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다른 나라들의 유사사례 == >'''일본에는 해군과 육군이라는 두 국가가 존재한다. 그 둘의 관계는 전쟁 중인 국가의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온, 당시 일본 해군의 전투기 제작을 도왔던 독일인 기술자의 수기 사실 이런 군 간의 대립이나 암투는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많이 있었다. [[관료제|관료조직]]이라는 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원래 목표보다는 조직 그 자체의 유지를 우선해서 추구하게 되므로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 [[일본군]]과 다른 점은 이런 대립을 조율할 수 있는 기관이 있느냐 없느냐'''는 점과 '''어느 정도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느냐'''이다.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결국 봉건시대 무가사회의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별개의 정치권력형 이익집단이어서 중앙집권화와 문민통제에 실패해 조율이 전혀 불가능했다. 타국의 경우, [[합동참모본부|합참]]이나 국방부 같이 육해군을 통솔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하여 조화를 이룬다. 심지어 [[육방부]]의 나라 한국조차도(비록 국방부, 합참에는 육군 장성들이 득실대지만) 이런 일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일본제국에는 육해군 통솔기구로 '대본영'이 있었지만, 대본영의 수장은, 헌법에 보장된 것과 달리 바지사장이 된 [[천황]]이다. 즉, 실권은 부족하고 디테일한 개입을 관행상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통합리더쉽의 부재는 군대 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조직이든지 배가 산으로 가고, 탱크가 잠수를 하는 병크를 낳는다. 또한 정상적인 조직체계를 가진 군대라면 전쟁의 승리를 위해 특정 이슈를 놓고 대립 선상에 있는 내부 조직을 상대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절충안이나 합의점을 찾아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타군과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적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사례가 너무도 많았다'''. 이런 현상은 로봇물 같은 데에서 악당들이 내분으로 인해 주인공에게 어부지리를 안기는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일본군이 이런 개막장으로 치닫게 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전근대 사회를 표면적으로만 근대화시켜서 누구도 강력하게 헤게모니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성립된 지역기반 연립정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초기에는 정부에서 군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초창기 일본의 토막파 측의 유력인사들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고, 군은 그들의 휘하세력 또는 그들의 동료였으며 때문에 간부들도 이들과 파벌 및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즉 비공식적인 [[인맥]]을 통해서 물밑에서 조율하는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토막파 내에서도 세력 구도가 분화되거나 변화했고 군은 각 군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그나마 연결고리가 되어주던 파벌 내의 유대감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이에 메이지 신정부 초기에 구축한 질서의 맥은 끊기게 되었고 남은 것은 연결고리가 없어져서 각자 따로 노는 각 세력들이었다. 제도적인 장치는 미흡하고 그동안 비공식적인 인맥을 통해서 군을 통제해왔는데, 이 인맥이 지역을 기반을 한 지연에서 육군사관학교, 해군병학교라는 학연 체제로 변화하면서 육군과 해군은 정부에서도 완전히 독립된 그리고 서로 분리된 국가 안에 있지만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거대한 집단이 된 것이다. 껍데기만 서양을 따라했을뿐, 의식은 아직 막부 봉건번국시대에 머물러 있던 당시 일본제국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사례다. [* 이에 대해 일본의 저자 요나하 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근대화를 추구한 메이지 유신은 결국 실패했고 전통시대로의 회귀를 지향한 쇼와 유신이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서로 절충하고 타협하며 하다못해 최소한 양보를 한 번씩이라도 주고 받는 식으로 관계가 유지되었다면 오늘날의 역사는 좀 더 달랐을 지도 모른다. 일본군 육군이나 해군 모두 서로의 사정이나 관계, 이유로 인해 알력다툼을 벌였다. 정부는 예산 권한 등의 권한으로, 군은 육군대신, 해군대신을 오로지 현역 중장, 대장만이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십분 이용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빈 자리 못채우는 내각은 자동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구 일본이 경제 대공황으로 맛이 가버리고 막나가기 시작해서 일명 쇼와 15년 전쟁을 치루기 시작하는 1930년대 이후에는 이마저도 귀찮았는지 정치적 대립 따윈 개나 줘버리고 아예 '''[[5·15 사건|암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현대사회의 각국 군대를 비교하면 '''어딜 봐도 일본군 같이 군 파벌화 문제가 심각한 곳은 없었다'''.[* 이전부터 [[바그너 그룹]]을 비롯한 비정규군과 정규군 간 갈등이 있었는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군내 파벌 갈등이 구 일본군 못지않게 심화되었다. 다만 바그너 그룹의 연이은 작전실패로 양자간 갈등이 군부쪽의 승리로 굳어져가고 있다는 서구쪽 보도가 23년 1월기준으로 조금씩 나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